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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C는 성경 66권 다음의 67권째 메시지입니다.

친젠도르프와 헤른후트 :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저자/역자 이은재
정가 18,000원
판매가 16,200
발행일 2020년 6월 30일
정보 신국판 무선 / 376쪽
ISB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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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서소개

이 책은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친젠도르프의 생애와 그가 설립한 헤른후트 공동체의 기원과 지난 250년 동안 걸어온 발전 과정에 대해 다룬다. 종교개혁 이후 18세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가 종교적 의식을 대신하게 되었고, 당연시되던 교리와 관습들이 의심과 도전을 받았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사조를 거쳐 신앙무용론 혹은 종교적 의식의 폐기를 주장했던 당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세워졌던 헤른후트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이웃을 향한 섬김의 공동체로서의 본을 보여준 모습을 통하여 오늘날의 다양한 사조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어야 할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게 한다.

저/역자

작가소개

이은재
감리교신학대학교 동 대학원(Th. M.)을 졸업 후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신학박사(Th. D.) 학위를 받았다. 현재 풀뿌리선교회 이사, 국제학생교류회(YFU) 이사 그리고 감리교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역서
『교회사 연구 방법론(프로세미나3)』 (CLC, 2013)
『중세교회 신학』 (CLC, 2012)
『열매 맺는 성도의 다섯 가지 실천』 (CLC, 2010)
『종교개혁의 역사』 (CLC, 2009)
『성령의 제국 감리교』 (CLC, 2009)
『경건주의 신학과 신학자들』 (CLC, 2009)
『성경적 기독교세계관』(한영합본, CLC, 2020) 외 다수


역자소개

목차

서문을 대신해서 6
일러두기 12
제1부 친젠도르프와 헤른후트 22
1 친젠도르프라는 사람 23
2 교육과 학습 여행 33
3 결혼과 직업 45
4 헤른후트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 50
5 1727년 8월 13일: 형제회의 전환 61
6 도전과 반응 74
7 순례 공동체 101
8 지경을 넓히다 132
9 헤른학: 베테라우 공동체 170
10 그리스도를 향한 수고 205

제2부 형제회의 신학과 유산 236
1 옛 형제회의 유산 237
2 공동체 의식 245
3 형제회와 여성 249
4 소그룹과 영적 교제 260
5 경건과 신비주의 262
6 예수 옆구리 상처 268
7 예배와 찬양 274
8 선교 공동체 284
9 종교적 회심의 의미 292
10 친젠도르프와 영국 모라비안 298
11 형제회와 존 웨슬리 307
12 공동체: 평가와 가치 326

친젠도르프 연대표 표시 338
참고 문헌 345
미주 351

추천사

친젠도르프는 해가 지나면서 자신의 소유지에 관한 용무들을 감당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거주지를 위한 명칭을 “헤른후트”로 관철시켰고, 1723년 11월 11일에는 이 지역을 위한 통행증을 발급했다. 이는 신앙 망명자들에 대한 안전보장서 같은 것이었다. 1723년 여름 베르텔스도르프에 친젠도르프의 저택이 입주 가능해지자, 가정교회가 세워졌다. 그곳에서 후일 헤른후트 공동체에서 중요해진 소그룹 모임이 시작되었다. - p. 54
경건주의의 넓이와 깊이는 필요와 질문의 다양성을 반영한 것이며, 신앙적인 결단을 요청했다. “거듭난 자들”혹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 연합이 일어났다. 공동체 안에서 종교적인 활동에 대한 평신도의 자발적인 필요가 전개되었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분업이 점증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 이동이 불가피한 것을 수용했다. 미지의 범위와 크기로 교회의 범주를 돌파해야 하는 새로운 그룹 정체성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양하고 활발하게 소그룹이 전개되었다.-p. 122

친젠도르프는 영국의 사역을 확고하게 하려고 1751년 8월부터 1755년 3월까지 자신의 주소를 런던으로 옮겼다. 친젠도르프는 형제회를 위한 사역에 새롭게 돌진했다. 1753년 초에 그는 별장인 린지하우스를 런던으로 옮겼다. 그는 단순하고 소탈한 귀족 저택을 개축하도록 명했다. 게르스도르프가 토지의 건축 형태를 구성하고 전체를 기획했다. 새로운 거주지는 형제회 시설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형제회 역사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장소가 되어야만 했다. -p. 217

친젠도르프나 다른 평신도가 교구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서 설교를 읽어 주었다. 그러다가 점차 지역에 사는 다른 사람들이 오후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해서 이것이 낯선 이들의 예배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저녁이면 형제회만을 위한 예배가 시행되었다. 이때는 특히 영혼을 교화시켜서 구세주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하려는 데 초점을 두었다. 또 다른 예배로는 “기도의 날”(Bettag) 혹은 “공동체의 날”(Gemeintag)로 불린 것인데,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기독교인들의 보고서나 편지들을 읽었으며, 나중에는 다양한 지역의 선교사들로부터 온 서신들을 나눠 읽었다. 이 예배는 선교를 위한 열정을 양성하였다. 1730년 헤른후트에서 세례가 시행되었고, 1731년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p. 278

모라비안교회가 영국교회와 분리된 교회 그리고 반대하는 교회로 인식되면, 선교는 그 길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진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원칙이 실제적인 숙고로 제시되었다. 즉, 모라비안교회를 영국교회 옆에 하나의 자유교회로 세우는 것은 기존의 존재하는 교회들 가운데서 형제회를 각성된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로 파악하는 친젠도르프의 총제적인 이해에 모순되고 반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p.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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